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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 천지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황인채

 

  백두산 천지가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높은 해가 천체 망원경인가 뭣인가로 찍은 사진 속에서 요동치며 활활 타오르고 있듯이. 아니다. 백두산 천지는 타오르는 것이 아니라 용트림하고 있었다. 엄청난 기운으로 설레이며 다가오는 새날, 새 세상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내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수묵으로 백두산을 그린 한 폭의 산수화다. 그러므로 검은 먹으로 그린 그림, 그것도 산과 물을 그린 산수화를 두고 요동치며 타오르는 해와 비교한다는 것은 도무지 맞지 않는 비유였다. 그러나 나는 한 폭의 그림에서 태양처럼 충만한 에너지를 느끼고 있었다.

 

  문득 인기척을 느끼고 돌아보았을 때 내 나이 정도의 여인네가 있었다.

“백두산을 위에서 보고 그린 그림이어요. 사진을 위에서 찍듯이.”

이 한 마디로 여인네와 내가 그림을 보고 느끼는 느낌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알 수 있었다. 여인네는 그림을 그저 사진과 같은 것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이 그림은 사진을 찍듯이 그린 그림이 아니었다. 백두산에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솟아나는 에너지를 던져서 백두산의 정기와 한민족의 정기가 한데 어우러져서 춤추는 모양을 그리고 있었다. 여인네는 계속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이었다.


“여기 전시해 놓은 그림들 파는 그림이어요.”

“이 그림 값이 얼마인데요?”

나는 내처지가 마음에 드는 그림을 발견하더라고 절대로 살 수 없는 형편이라는 것을 잘 알면서도 한번 물어보았다.


“삼백 만 원이어요. 표구 값도 있고 배달하는 데도 돈이 들고.”

여인은 이 그림이 결코 비싸지 않다는 것을 몇 마디 더 보태서 설명하였다. 그림을 돈으로 계산하자면 여인의 말도 참조할 필요가 있었다. 그보다는 내가 이 그림에서 느낀 감동의 크기를 말한다면 그림 값은 훨씬 더 비싸도 좋았다. 그러나


“내가 그림을 살 수 있는 형편이 아니어요.”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카드로도 돼요.”

여인은 한 마디 더 보태고는 더 권하지 않고 순순히 물러났다. 나는 더는 여인에게 신경을 쓸 필요없이 다른 그림들을 구경할 수 있었다.


  지하철 노원역에서 내려서 한참을 걸면 도달하는 면허시험장에 적성검사를 하러갔다가 잠시 짬이 나는 시간에 민원창구 앞쪽에 전시해 놓은 한국화 십수 점을 구경하고 있는 중이었다. 우연히 이 그림을 만난 것이라고 해야 옳다. 작가는 이영희라는 북한 작가였다. 그림에는 아주 문외한이라고 해야할 내가 이 작가를 알 리도 없고 이 그림이 가지는 의미를 정확히 집어낼 수도 없었다. 단지 이 그림에서 정통적인 산수화에서는 느낄 수 없는 새로운 감동을 느낄 뿐이었다.


  정말은 내가 그림을 눈여겨보는 기회는 거의 없었고 또 그림을 찾아 전시장을 찾아본 일도 열 손가락으로 꼽을 수 있을 만큼 적어서, 산수화에 대해서 할 수 있는 말이라면 한 마디뿐이었다. 신선이 노니는 경지! 나는 산수화를 대하면 신선도를 생각했고 노자와 장자도 생각했다. 그리고 일용 노동자인 나와 산수 속에서 한가하게 노닐며 살아가는 신선과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는 것이기에 내가 산수화에 푹 빠져들 일도 없었다.


내가 내 모든 것을 바쳐서 해야할 일은 가난 속에 우는 나를 해방하는 일이었다. 그것은 민중해방이었고 민중해방은 황인채 해방이었다. IMF 환란 전까지 나는 그랬다. 민중해방 외에 다른 것을 생각하는 것은 사치였고 배반이었다. 그런데 IMF 환란이 오고 나는 커다란 어려움에 빠졌다. 


  민중 해방이 사치가 되는 어려움. 낮선 전북 진안군 한 산골로 IMF 피난살이를 떠났던 나는 그곳에서 단지 굶어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큰 감사를 느끼며 굶어 죽지 않기 위해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을 하였다. 토끼가 먹는 먹이가 풀이라는 것에 착안하여 토끼 기르기를 시작하고, 토끼 먹이를 대기 위해 풀베기로 세월을 보냈다. 그 일은 이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 년 후에야 IMF 환란이 물러난 서울로 다시 올라와서 예전에 하였던 노동일을 하며 한숨을 돌리게 되었다.


  그런데 나는 또 다른 고통에 울어야 했다. IMF 피난살이 때 하였던 고생으로 몸에도 마음에도 병이 난 것이다. 허리가 아파서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고 또 마음의 고통에 많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우기도 하였다.


  일을 할 수 없을 때는 할 수 없이 공부를 해야 했다. 컴퓨터 서적과 영어공부, 주식투자에 대한 공부 이런 것들이 내가 하는 공부였다. 예전 같으면 나는 결코 주식투자에 대한 공부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주식에 대한 공부는 내 편에서 기업을 이해하려는 공부이고 내가 기업가가 되어보고 싶다는 마음도 갖게 하였다. 나는 이 세상을 바꾸는 투사보다는 이 나라가 또 한번 IMF를 겪어서는 아니 된다는 것에 더 마음을 쓰고 있는 것이다.


  올 여름에는 노자와 장자를 번역한 책을 한권 샀다. 나와는 상관없던 신선에 대해서 알아보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노자에게서 상당히 큰 감동을 받았다. 자연 속에서 쑥대처럼, 또는 다람쥐처럼 살아갈 것을 주장한 노자는 신이나 관념을 앞세우는 관념론자이기보다는 물질이 스스로의 법칙으로 변화하며 조화를 이루는 세상을 주장하는 유물론자였다. 그러면서 또 유와 무를 대립시켜서 설명할 수 없는 근원적인 것을 무라고 하여 관념론에 빠지기도 하였다.


  노자가 유의 세계에 대해서 좀더 치우쳤다면 역사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역사가 발전하는 법칙을 발견하려 하였을까? 그러나 그는 무를 주장하는 무위의 도를 내세워서 신선이 되었다. 신선은 노동자에게 피해를 주지도 않았지만 노동자에게 도움도 되지 않았다. 아니다. 노동자가 노동을 버리고 신선을 따라서 산으로 들어간다면 이 세상은 산수화에 나오는 신선이 한가하게 노니는 그런 세상이 될까?


  아, 노자가 나를 향해 신선이 한번 되어보라고 손짓하며 꼬시는구나. 그런데 신선이 되는 거를 배우는 것도 꾀나 어렵고 힘들어 보이는데, 내가 노자 당신 따라 신선도 배웠다가 혹시나 후회를 하지 않을지요? 아 모든 장사꾼들이 교묘한 상술로 나를 꼬셔서 내 돈을 빼어가고 상품을 주지만, 많은 상품이 돈만 뺏어먹고 쓸모는 별로 없는 것뿐이데요. 월사금 내고 노자 당신 따라 갔다가 신선도도 별볼일 없는 것이어서, 내가 본전 생각하며 후회하게 되는 것 아닌지요.


  면허 시험장에 전시된 그림 중에는 전통적인 산수화들이 여러 점 있었다. 기개를 느끼게 하는 뾰족한 바위로 이루어진 산봉우리들과 늘 당당한 소나무와 부드러움과 여유와 멋을 느끼게 하는 새하얀 강물, 그리고 몽롱한 기쁨에 젖어든 산허리에 걸린 구름. 그중 나는 매우 큰 한점의 산수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웅장한 산수 속에서 두 사람의 낚시꾼이 낚시질을 하고 있었는데 그 크기가 매우 작아서 사람이 하찮은 개구리처럼 보이는 것이었다. 산수 속에서 사는 사람은 개구리나 매미 일 수도 있고, 한 개의 돌멩이일 수도 있겠구나. 자연 앞에 그토록 겸손한 자세가 마음에 들었던 거다.


  그러나 전통 산수화는 잘 그린 그림이어도 별 것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무대서나 볼 수 있는 흔한 것이었으니까? 새 것에 감동하기를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에 그저그런 산수화는 복제품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렇더라도 좀더 그림에 대한 안목이 높아지면 비슷비슷한 그림 속에서도 미묘한 차이를 발견하고 큰 기쁨을 수 느낄지 모른다.


  북한 작가 이영희 씨가 백두산을 그린 산수화에는 다른 산수화에서 느낄 수 없는 특이한 것이 있었다. 산봉우리는 뾰족하지 않았고, 구름은 몽롱하게 산허리에 걸리지 않았다. 천지에 고인 물도 여유와 멋만 내는 물이 아니었다. 그 물이 파도치는 바다처럼 출렁이고 있었다. 그것을 새 세상을 열고 싶어하는 기도라고나 할까, 창조를 위한 에너지로 용솟음치는 한민족의 기상이라고나 할까?


  나는 그 그림을 디지털 카메라로 찍어서 내 인터넷 홈피에 올리고 싶었다. 하지만 그 그림을 살돈은 고사하고 카메라도 못사는 처지이기에 그 일은 할 수 없었다. 그래도 뜻이 있는 데 길이 있을 것이고, 나는 오래지 않아 기여이 디지털 카메라서 사서 내 홈피를 장식할 사진들을 찍을 것이다.

  그저께 팔천 원을 주고 한권의 책을 샀다. 헌책방에서 우연히 발견한 김호석의 한국화집이다. 지금껏 나는 결코 화집을 사본 일이 없었다. 그만큼 나는 그림과 멀었다고 할 수 있다. 명색이 소설을 공부한다는 내가 시집도 몇 권 사지 않았다. 나는 오로지 단편소설이었다. 소설을 써서 밥을 벌어먹는 작가가 되고 싶었고 그 일을 위해 많은 시간과 돈을 들일 수 없는 내 처지에서는 오로지 한 장르에만 매달려서 그것에 통달한 기술자가 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체념으로 소설에 대한 열정은 식었다. 사실은 내가 공부한 컴퓨터 실력을 써서 홈피를 만들고 유지해 보려고 하는데 그래도 내가 그 중 잘 할 수 있는 것이 글쓰기였다. 내가 뭔가 보여 줄 수 있는 것이 글 솜씨밖에 없다는 것 때문에 그것을 이용하여 넷티즌을 끌어 모으기 위하여 글을 쓰고자 하는 것이다. 이렇게 직업 소설가가 되기를 포기한 자리에서 제법 여유가 생겨서, 전에는 보지 못했던 그림도 보고 즐기며 음악도 들으며 즐기고 싶다.

 

  김호석의 화집을 사기 전에 그도 전혀 모르는 자였다. 화집을 집에 가져와 두어 시간 뒤적이고 난 다음에야 그는 나에게 다소 낯익은 사람이 되었다. 한국화이며 수묵 채색화인 그의 그림이 나에게 잔잔한 기쁨을 주었다. 수묵으로 그린 그의 그림은 전통 한국화와는 매우 달랐다. 오히려 서양화에 가까워 보이는 그림들이었다. 그런데 그 그림들이 내게 매우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가 걸어오며 풀려고 했던 문제들이 바로 내가 풀려고 했던 문제들과 너무 비슷했기 때문이다.


  수묵으로 만들어 낸 순수 조형 예술에서부터 숨가팠던 민주화 운동과 민중 예술, 그리고 불교의 선의 경지를 그린 그림들, 우리의 친근한 이웃 사람들의 표정을 애정을 가지고 그린 그림들과 가축을 그린 그림. 무채색인 먹과 피와도 같고 뜨거운 열정과도 같은 선홍색의 유채색이 빚어내는 팽팽한 긴장. 사물에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서 응얼거리는 알 수 없는 에너지를 비추어 낸 몇 편의 그림들.


  그런데 나는 이 그림도 내 홈피를 방문하는 사람들에게 보여 줄 수가 없구나. 내게 스캐너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젠가는 스캐너를 갖추어 이 그림 중에 몇은 스캔하며 내 홈피를 찾는 사람들에게 공짜로 보여 줄 생각이다. 내가 팔천 원이라는 피 같은 지전을 투자하여 얻은 잔잔한 감동을 값없이 나누어 줄 생각으로.


  예술의 세계라, 그리고 감동의 세계라. 예술이 밥먹여 줄 리는 없다. 감동을 아무리 먹어도 살은 찌지 않는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에는 감동이라는 양식이 필요하다. 감동을 하고 나면 차갑고 메마르기만 하던 세상이 갑자기 변해 보인다. 감동을 먹고 난 오늘은 잿빛 콩크리트 감옥 서울이 갑자기 수묵과 채색으로 만들어낸 조형처럼 기꺼워 보이는구나. 산책길에 만나는 소나무며 잎이 떨어진 나무도 갑자기 새로워지고 정겹기만 하다. 아, 까치도 깍깍 울며 인사를 건네는구나.


  어린 시절 유난히도 옛날이야기를 좋아하여 할머니나 누님을 졸라서 들었던 옛날 옛적에 감동에서부터 소설책을 밤세워 읽고 벅찬 감동에 밥입맛까지 잃었던 일들, 신나게 두들겨대는 사물놀이 패의 장단에 황홀경에 빠지는 일까지 이 모든 감동들이 메마른 내 삶을 적시는 단비가 되어 주었지.


  이 겨울에도 나는 감동을 찾아야겠다. IMF 피난살이에 골병이 들었던 내 마음의 병들도 새로 찾은 감동들로 치유되기를 바란다. 꿈을 잃고 방황하는 내 인생이 감동을 먹고 새 꿈을 꾸고 활력을 찾기를 바란다. 그리고 내 홈피를 찾는 사람들에게 감동을 전해 주기도 하고 감동을 받기도 하기를 바란다.


  여기 북한 작가가 백두산을 그린 산수화 한 폭이 있습니다. 오늘 그 그림을 마음의 양식으로 여러분에게 선사합니다. 말로써 복제한 산수화도 그렇듯 하지 않은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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